거지

분류없음 | 2009/05/07 15:11 | chester

오늘 날씨는 완벽하다. 추운 날씨는 죽도록 싫어하고, 더운 날씨는 그럭저럭 싫어하는 나에게 오늘은 완벽한 날씨다. 강남역 7번출구를 나서면서 느껴지는 대기의 기운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그 상태.. 긴팔을 입어도 덥지 않고, 반팔을 입어도 춥지 않은, 습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그냥 아무런 날씨도 느낄 수 없는 이런 날씨가 바로 내 날씨다.  거지가 되기에도 이런 날씨는 최적이다 .

 

강남역 출구에서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나다가 보면 가끔 거지가 되는 생각을 해본다. 7번 출구로 지나가는 이 사람들이 나에게 100원씩 던져주면 하루 매출이 어느정도 될까 ? 내가 투입해야 되는 노력은 어느정도일까 ? 우아~ 마진율 98% 정도 기록하는 아니야 ? 세금도 안내도 되고.. 흐음 그런데 내가 100원씩 받으려면 어떠한 효용을 제공해야 하는 걸까 ? 무엇이 핵심상품인거지 ? 어떠한 인구계층이 나의 핵심고객이 될까 ? 그중에서 몇퍼센트 정도나 나에게 귀하디 귀한 100원짜리 하나를 던져줄까 ?  프라임타임은 오후 다섯시에서 여덟시 정도가 될것 같고 , 목을 선정하는 센스가 아주 중요해 보인다. 너무 거지같아 보이지 않으면서도 불쌍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지션은 어디정도 될려나.  돈은 어떤식으로 받아야 좋을까 ?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니 약간은 헤어진듯한 박카스 통에 약 1400 원정도의 밑밥을 뿌려두면 딱 괜찮을려나 ? 50원짜리 살짝 섞어서. 흐음.. 아니면 IT 출신답게, T-money 로 딱딱 긁으면 100원씩 내면 어떨까나 ?  연말에 기부금으로 환급받을 수 있게 해주고, 옆에는 매일 당신이 100 원을 기부할때마나 실질적으로 어떠한 세제혜택이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21세기형 모델은 어떨까. 절약하는 세금분을 잘 계산해보고 한국거지협회를 만들어서 비지니스를 스케일러블하게 만들면 돌아가겠다라는 생각도 좀 들고.. 기왕이면 facebook 에서 친구신청도 받아주고 .. 뭐 .. 사람들은 심심하니까웬지 흥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내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비지니스 모델의 리스크가 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거지로서의 나의 역량을 고찰한 끝에 나보다 이걸 더 잘하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라는 생각에까지 미치는 순간, 그냥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강남역 7번 출구앞에서 거지가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건 돈 때문이 아니다. 그냥 하루종일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고 싶어서라는 간단한 생각에서 출발을 한것이다. 그냥 바라만 보기만 하면 그 사람들의 눈을 읽을 수 없으니,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수단,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엉뚱한 수단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오감을 눈빛에 담아서 보내는 그 찰나의 시선속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설같은 생각을 살짝 했다.  얼마나 답답하면 이러겠나 싶기도 하고.

 

내가 맨날 PT 에 써대는 '고객' 역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뭘 못해주고 있는 걸까 ?? 내가 과연 사람들의 가치를 이해나 하고 있는 걸까 ?  얼굴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저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새로나온 디카를 사러 가는 오타쿠일까 ? 아니면 여자친구 만나러 ? 흐음 아닌것 같고..  15년전에 마지막 만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  스타벅스 앞에서 잔뜩 서 있는 저 한무리의 사람들은 오늘 뭐하러 나온걸까 ? 저들은 매일 강남역에 출근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오늘 어쩌다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걸까.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아는게 거의 없다는 자각때문에 요새는 내가 나의 모든 감각을 상실한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건 묘한 상실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 그러한 상실감 속에서 누구를 위해서 치는 종인지 잘 구분이 안되는 종을 계속 치고 있으려니 문뜩 시계떠올랐다 .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큰 바늘, 작은 바늘 달린 시계..


2008.05.06 20:30 강남역에 새로 생긴 크리스피크림에서